이타가키 다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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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1837년에 태어나 1919년에 사망한 일본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다. 그는 자유민권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본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헌정의 아버지'로 불린다. 막부 말기에는 존황양이 사상에 입각하여 개혁 운동을 주도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정부의 요직을 맡아 폐번치현 등 개혁에 참여했다. 이후 자유민권 운동을 이끌며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주장했고, 자유당을 창당하여 총리(당수)를 역임했다. 그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과 일본의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을 결합한 독자적인 자유민권사상을 주창했으며, 반(反)서구주의와 반(反)기독교적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일본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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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가키 다이스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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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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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이타가키 다이스케 (板垣 退助) |
출생일 | 1837년 5월 21일 |
출생지 | 도사 번, 일본 |
사망일 | 1919년 7월 16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제국 |
국적 | 일본 |
직업 | 정치인, 각료 |
작위 | 종1위, 백작 |
훈장 |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애국공당 애국사 국회기성동맹 자유당 애국공당(재건) 자유당 헌정당 |
내무대신 | 제2차 이토 내각 제2차 마쓰카타 내각 |
내무대신 임기 | 1896년 4월 14일 ~ 1896년 9월 20일 |
내무대신 | 제1차 오쿠마 내각 |
내무대신 임기 | 1898년 6월 30일 ~ 1898년 11월 8일 |
가문 정보 | |
가문 | 도사 이타가키 씨 |
당주 | 제10대 당주 |
가문 당주 임기 | 1860년 ~ 1919년 |
선대 당주 | 이누이 마사시게 |
후대 당주 | 이타가키 모리마사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하야시 마사시게의 여동생 (정실) 나카야마 야헤이지 히데마사의 차녀 (계실) 이타가키 스즈 (계실) 이타가키 기누코 (계실) 이타가키 세이코 (계실) |
자녀 | 이타가키 호코타로 (장남) 이누이 세이시 (차남) 이타가키 손자부로 (삼남) 이타가키 마사미 (사남) 이누이 무이치 (오남) 가타오카 헤이코 (장녀) 미야지 군코 (차녀) 오가와 엔코 (삼녀) 아사노 치요코 (사녀) 고야마 료코 (오녀) |
친척 (정치인) | 이타가키 노부카타 (원조) 이타가키 노부노리 (원조) 이타가키 마사노부 (원조) 야마우치 교부 (원조) 이누이 마사키요 (5대 조부) 이누이 나오타케 (고조부) 이누이 마사토모 (증조부) 이누이 노부타케 (조부) 이누이 마사나리 (부친) 가타오카 미쓰후사 (사위) 미야지 시게하루 (사위) 오가와 가즈마 (사위) 아사노 야스지로 (사위) 고야마 도모에 (사위) 이타가키 모리마사 (손자) 이타가키 마사쓰라 (손자) 이누이 이치로 (손자) 미야지 시게아키 (손자) 가와세 도쿠타로 (손자 사위) 스기사키 미쓰요 (증손자) 가타오카 다카시 (증손자 사위) 다카오카 고타로 (현손) |
2. 생애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덴포 8년(1837년) 도사번 상사 이누이 마사나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이노스케, 통칭은 퇴조(退助)였다. 고토 쇼지로와는 죽마고우로, 함께 카가미가와 등지에서 뛰어놀며 성장했다. 소년 시절 장난기가 많았고, 의협심이 강해 약자를 괴롭히는 자에게는 싸움으로 맞섰다.[47] 안세이 3년(1856년)에는 분쟁에 가담한 죄로 근신 처분을 받고 유배되기도 했지만, 이곳에서 서민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53]
막말에는 도사번 내 무력 토벌파의 중진으로 활동하며 사쓰마번과 밀약을 맺고,[30] 보신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아이즈 공략전에서 공을 세웠으며, 닛코 도쇼구를 전화로부터 보호했다. 그는 존황 사상을 바탕으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며 국회 개설과 불평등 조약 폐지를 요구했다.[32]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에 찬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871년 한 제도 폐지 등 여러 개혁에 참여했다.[125]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내정을 담당했다.[107] 1871년, 조선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주장하며 정한론을 펼쳤으나,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46] 결국 1873년, 정한론을 둘러싼 갈등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함께 정부를 떠났다.[75]
이후 고토 쇼지로 등과 애국공당(愛国公党)을 결성하고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하며 자유민권운동을 시작했다.[1] 립시샤(立志社)와 애국사(愛国社)를 결성하여 운동을 이끌었으며, 1881년에는 자유당을 창당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1] 1882년 기후에서 암살 위협을 받았을 때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1]
1896년,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합류하며 정계에 복귀했고,[1] 1898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와 헌정당을 결성, 제1차 오쿠마 내각의 내무대신을 역임했다.[1] 1900년 은퇴 후에는 대만 동화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 개량 운동에 힘썼다.[2] 1919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
이타가키 헤이타로 동상 기념비 건설 동지회 건립]]덴포 8년 4월 16일 (1837년5월 20일) 도사번 상사(300석) 이누이 마사나리의 장남으로[39], 고치성 아래 나카지마초 (현 고치현 고치시 혼마치 2-3-18 고노데라)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이노스케(猪之助)였고, 통칭은 퇴조(退助)였다. 휘는 처음에는 마사미(正躬), 나중에는 마사카타(正形)였다. 호는 무케이(無形)이다.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가케가와 번주였던 시절 등용된 도사 번의 상사 가문이었지만, 이누이 가문(이타가키 가문)은 검소하고 강인함을 가풍으로 삼았다.[40][32]
고토 쇼지로와는 죽마고우로, 함께 카가미가와와 시오에 덴만궁 등지에서 뛰어놀며 성장했다. 소년 시절 장난기가 많아 뱀을 싫어하는 고토 쇼지로를 놀리기도 했다.[42]
소년 시절 “두꺼비 기름을 바르면 강에 잠수해도 숨을 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토 쇼지로와 함께 두꺼비 기름을 만들었으나, 심한 악취 때문에 발각되었다.[43] 카가미가와에서 헤엄치다 귀에 물이 들어가 중이염을 앓았고, 수 년에 걸쳐 청력(돌발성 난청)을 잃어 취학에 어려움을 겪었다.[53] 그러나, 이후 우연한 계기로 고름이 터져 나오면서 청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44]
이타가키는 고쿠츄(고치 성 아래의 무사 거주지)에서 인기가 많았고, 의협심이 강해 약자를 괴롭히는 자에게는 싸움으로 맞섰다.[47]
안세이 3년 8월 8일(1856년9월 6일) 분쟁에 가담한 죄로 고치 성 아래의 네 마을(고다카사카·시오에·시모치·에노구치)에서 근신 처분을 받고 가미다무라(こうだむら)에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벼 수확과 탈곡을 돕는 등, 신분에 관계없이 서민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53]
2. 2. 막말 활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막말 “전쟁의 결과에 의해 형성된 사회 질서는 전쟁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뒤엎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도사번 내 무력 토벌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사쓰마번과 '''사쓰마 토사 토벌의 밀약'''을 맺고,[30] 도사번의 병제를 개혁하여 근대식 훈련을 실시했다. 독단으로 도사번 저택에 덴구토 낭사를 은닉하고 사쓰마번에 신병을 위탁했는데, 이들이 막부를 도발하여 에도 사쓰마번 저택의 소각 사건을 일으키면서 보신전쟁의 선봉전을 치르게 된다.
도바·후시미 전투 개전 후, 이타가키는 천황 어친정 동산도 선봉 총독군 참모 및 진충대 총독(도사번 육군 총독)이 되어 보신전쟁에서 활약한다. 특히 고슈 가쓰누마 전투와 아이즈 공략전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아이즈 및 쇼나이 양번의 에조지 매각 계획을 저지하고 닛코 도쇼구를 전화로부터 보호했다.
이타가키는 절대 존황주의자이자 군민일체에 기반한 자유민권운동 주도자로, “군주는 민을 근본으로 하므로 군주주의와 민본주의는 대립하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자유민권운동은 억조안무국위선양의 어신한의 뜻을 받들어 존황을 기초로 오개조의 어서문의 “널리 회의를 일으켜 만기를 공론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조항을 중시하며, 국내적으로는 국회 개설, 국외적으로는 불평등 조약 폐지를 요구했다.[32]
2. 3. 메이지 정부 활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1869년에 찬정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871년 한 제도 폐지 등 여러 주요 개혁에 참여했다.[125] 그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는 동안 다이조다이진 산조 사네토미,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함께 참의로서 내정을 담당했다.[107]

1871년 11월 9일, 이타가키는 조선에 공식 사절을 보내 국교를 요청하고, 응하지 않으면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정한론)했으나, 이는 부결되어 사절단 귀국 시까지 동결되었다.[46]
1873년 5월 31일, 조선 부산의 대일본공관 대표 히로쓰 히로노부는 조선 정부가 일본인 밀무역 단속 포고에서 일본을 모욕하는 문구가 있었다고 보고하며, 거류민 보호를 위해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2] 이타가키는 1개 대대 파견을 주장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신을 사절로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2][45] 사이고는 이타가키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면 전쟁으로 이끌 것이라며 협력을 요청했고,[3] 8월 17일, 사이고의 사절 파견은 각의에서 결정되어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51]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사이고의 즉시 파견에 의한 개전이 러시아 제국 등 외국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며 반대하고, 내정을 우선하기 위해 사절 파견 연기를 요구했다.[8][9] 사이고는 즉시 파견을 고집했고,[57] 이타가키, 에토 신페이, 후쿠시마 다네오미, 고토 쇼지로도 이에 동조하며 특히 이타가키와 후쿠시마는 사이고를 강력히 지지했다.[59][60] 결국 10월 24일, 천황은 이와쿠라의 사절 파견 연기 상주를 재가했고, 사이고와 이타가키 등은 사직하여 정부를 떠났다.[75]
2. 4. 자유민권운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에 대한 반대와 장주번-사쓰마 번 중심의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1873년 정부에서 물러났다.[1] 1874년,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과 함께 애국공당(愛国公党)을 결성하여 민선의원설립건백서를 제출,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주장했다.[1] 이러한 주장은 사무라이, 지방 귀족, 농민 등에게 호응을 얻었다.[1]이타가키는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국회와 헌법 제정을 위한 여러 조직을 만들었다. 1875년에는 립시샤(立志社)와 애국사(愛国社)를 결성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이끌었다.[1] 이 운동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지만, 1875년 오사카 회의를 통해 이타가키는 잠시 정계에 복귀하기도 했다.[1] 그러나 원로원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며 다시 사임했다.[1]
1881년, 누마 모리카즈와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1] 그러나 자유당은 내부 분열과 정부의 탄압으로 1884년에 해산되었다.[1]
1882년, 기후에서 암살 위협을 받았을 때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1] 이 발언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되며, 이타가키가 평소 자유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134][136][137][138][139][140][141][142][143][144]
분류:자유민권운동가
2. 5. 정계 복귀와 말년
1896년 4월, 이타가키는 이토 히로부미의 제2차 이토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합류하여 정계에 복귀했다.[1] 1898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헌정당을 결성하여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인 제1차 오쿠마 내각을 구성했고, 총리가 된 오쿠마 밑에서 내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러나 이 내각은 당파 간의 다툼으로 4개월 만에 붕괴되었다.[1]1900년, 이타가키는 공직에서 은퇴하고 이후 대만 동화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사회 개량 운동에 힘썼다. 1914년에는 린셴탕과 함께 대만 동화회를 설립했는데,[2] 이 단체는 대만인의 권리와 처우가 일본인과 동등해야 하며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
1919년, 이타가키는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3. 사상과 업적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과 애국주의를 결합한 독자적인 자유민권사상을 주창했다. 고토 쇼지로 등과 함께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했으며,[1] 자유당을 창당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면서 국민개병과 사민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32]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통해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입헌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그는 철저한 존황주의자였으며, 군주제와 민주주의가 양립 가능하다는 '군민일체' 사상을 견지했다. 국민 중심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계승하여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껴 일본의 독자적인 발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의 사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으며,[187] 특히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사상에 대해 경계하며, 그 영향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187] 가족 중심의 윤리관과 조상 숭배 사상을 강조했다.[187]
정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사회개혁 운동에 힘썼다. 장애인 복지, 빈민 구제, 여성 인권 향상 등 소외된 계층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8년에는 차별받는 부락민들의 해방을 위해 일본 최초의 전국 조직인 제국공도회를 창설하여 차별 철폐 운동을 이끌었다.[13]
3. 1. 자유민권사상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서구의 자유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무사도 정신과 애국주의를 결합한 독자적인 자유민권사상을 주창했다. 1874년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과 함께 애국공당을 결성하고, "우리 일본 삼천만 국민은 모두 평등하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받았다"라고 선언하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주장했다.[1]1881년 누마 모리카즈와 함께 자유당을 창당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면서, '인민 평균의 이치'를 주장하며 국민개병과 사민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870년 고치 번의 대참사로서 "인민 평균의 이치"를 포고하고, 사민평등에 기반한 국방의 의무를 강조했다.[32]
이러한 이타가키의 주장은 사쓰마 반란으로 정부가 위협받던 시기에도 정부를 비판하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법률에 저항하는 동력이 되었다.
이타가키는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통해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입헌주의에 기반한 근대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그는 1882년 『자유당의 존왕론』을 통해 자유주의가 존황주의와 동일하다는 것을 역설하며 자유민권의 의미를 설명했다.
3. 2. 존황사상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철저한 존황주의자였으며, 군주제와 민주주의가 양립 가능하다는 '군민일체' 사상을 견지했다. 그는 국민 중심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메이지 유신의 정신을 계승하여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 체제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3. 3. 반(反)서구주의, 반(反)기독교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껴, 일본의 독자적인 발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그는 메이지 정부가 유럽과 미국의 사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187] 특히, 유럽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사상에 대해 경계하며, 그 영향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187]
이타가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하느님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그 외의 내용은 대부분 인간의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187] 그는 하느님이 인간의 일에 직접 관여하거나, 인간이 기도한다고 해서 그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187]
대신, 이타가키는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 중심의 윤리관과 조상 숭배 사상을 강조했다.[187] 그는 서구의 개인주의적 가치관보다, 가족과 조상을 중시하는 동양적 가르침이 일본 사회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다.[187]
그는 도덕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인간 스스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187]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3. 4. 사회개혁 운동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정계에서 은퇴한 후, 사회개혁 운동에 힘썼다. 그는 장애인 복지, 빈민 구제, 여성 인권 향상 등 소외된 계층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8년에는 차별받는 부락민들의 해방을 위해 일본 최초의 전국 조직인 제국공도회를 창설하여 차별 철폐 운동을 이끌었다.[13]4. 한국과의 관계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대만 의회 설립 청원 운동에 참여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승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타가키는 대만의 식민 정책에 대해 대만인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만인의 권리와 처우가 일본인과 동등해야 하고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윤치호 등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민권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5. 평가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일본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헌정의 아버지',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불리며, 일본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상과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일본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 헌정의 아버지: 이타가키는 메이지 유신 이후 국회 개설과 헌법 제정을 주도하여 일본 헌정의 기초를 닦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당신(이타가키 다이스케)은 국회 개설의 주창자이다. 나(이토)는 헌법의 입안자이다. 그러나 입헌 정치의 책임은 당신과 나에게 있다."[228]라고 평가했다. 호즈미 츠네시게는 "제국 헌법 제정은 물론이고, 혁신의 시작인 오개조의 맹서에 의해 확립된 국시에 근거하지만, ... 일본에서 헌정 확립의 유래를 말하는 사람으로서 (이타가키) 백작을 제외하고 다른 최적의 사람을 구할 수 없다."[229]라고 평가했다.
-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 자유민권운동을 이끌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노력했다. 1874년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와 함께 애국공당(Aikoku Kōtō)을 결성하여 "우리 일본 삼천만 국민은 모두 평등하게 특정한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 이러한 권리는 본래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므로, 어떤 사람의 권력으로도 빼앗을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미야케 세츠레이는 "이타가키가 민권 운동을 한 것은, 원수가 되는 것보다 일본 역사 속에서 훨씬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220]
- 청렴결백한 정치가: 평생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으며,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았다. 나카에 초민은 "이타가키는 (다른 정치가와 달리) 금전에 집착하지 않고, 무욕전담이다. 옛 무사의 풍격을 가지고, 교활한 데는 조금도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 군인으로서의 능력: 보신 전쟁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메이지 유신 성공에 기여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지금, 20만 군대를 이끌고 해외와 승부할 수 있는 자는 이타가키 외에는 없다"고 평가했다.[237] 가와카미 소로쿠는 "만약 이타가키 백작이 군인의 길을 걸었다면 반드시 원수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32]
- 존황 사상: 존황 사상이 투철했으며,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다. 오사다케 타케시는 "백작(이타가키)은 정당의 총리가 되어서도 황실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하오리하카마로 복장을 바꾸었으며, 폐하가 손수 심은 소나무 앞을 지날 때에는 공손히 경례하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라고 평가했다.[234][217]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1882년 우익 급진주의자의 암살 시도에 "이타가키는 죽을지라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그의 초상화는 일본은행이 발행한 50센과 100엔 지폐에 등장했다.
6. 저서
板垣政法論|이타가키 정법론일본어,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저, 植木枝盛|우에키 에모리일본어 기, 五古周二|이쓰코 슈지일본어 편, 자유루, 1881년
通俗無上政法論|통속 무상 정법론일본어,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입안, 植木枝盛|우에키 에모리일본어 기, 和田稲積|와다 이나즈미일본어 편, 에이리 자유출판사, 1883년
板垣伯意見書|이타가키 백작 의견서일본어,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저, 헌정당 당보국, 1899년
板垣南海翁之意見|이타가키 난카이옹 의견일본어,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저, 郷敏儒|사토 도시노리일본어, 1890년
愛国論|애국론일본어 板垣伯|이타가키 백작일본어 입안, 出射吾三郎|이데샤 고사부로일본어 편, 요시다 서방, 1890년
自由党史|자유당사일본어 (상하권),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감수, 宇田友猪|우다 도모이일본어, 和田三郎|와다 사부로일본어 공편, 오차루, 1910년/岩波文庫|이와나미 문고일본어 상중하권 초판 1958년, 복간 1997년 외
一代華族論|일대 화족론일본어, 伯爵|백작일본어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저, 사회정책사, 1912년
選挙法改正意見|선거법 개정 의견일본어,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저
板垣退助先生武士道観|이타가키 다이스케 선생 무사도관일본어, 板垣退助|이타가키 다이스케일본어 저, 高知|고치일본어 板垣會|이타가키회일본어, 1942년
憲政と土佐|헌정과 도사일본어, 板垣會|이타가키회일본어 편, 1941년
7. 가족 관계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이누이 마사아키(일본어: 乾正明|이누이 마사아키일본어) | |
조부 | 이누이 노부타케(일본어: 乾信武|이누이 노부타케일본어) | |
부 | 이누이 마사시게(일본어: 乾正成|이누이 마사시게일본어) | |
모 | 야마우치씨(일본어: 山内氏|야마우치 씨일본어) | |
부인 | 스즈 | |
기누코(일본어: 絹子|기누코일본어) | 후쿠오카 다카치카(福岡孝弟)의 양녀 | |
(이름 미상) | 도사 번(土佐藩) 사무라이 하야시 마스노죠 마사모리(林益之丞正盛)의 여동생 | |
(이름 미상) | 도사 번 사무라이 나카야마 야헤이지 히데마사(中山弥平次秀昌)의 차녀 | |
아들 | 이타가키 호코타로(일본어: 板垣鉾太郎|이타가키 호코타로일본어) | |
이누이 세이시(일본어: 犬養清史|이누이 세이시일본어) | ||
아라키 마고자부로(일본어: 荒木孫三郎|아라키 마고자부로일본어) | ||
이타가키 마사미(일본어: 板垣正巳|이타가키 마사미일본어) | ||
이누이 무이치(일본어: 犬養武市|이누이 무이치일본어) | ||
손자 | 이타가키 모리마사(일본어: 板垣守正|이타가키 모리마사일본어) | |
이타가키 마사쓰라(일본어: 板垣正圀|이타가키 마사쓰라일본어) | ||
딸 | 효(일본어: ヒヨ|효일본어) | 카타오카 쿠마노스케(片岡熊之助)와 결혼 |
군(일본어: グン|군일본어) | 미야지 시게하루(宮地繁治)와 결혼 | |
엔(일본어: エン|엔일본어) | 첫 번째 남편 야스카와 진이치(安川甚市)와 이혼 후 사진작가 오가와 카즈마(小川一眞)와 재혼 | |
치요코(일본어: チヨコ|치요코일본어) | 아사노 타이지로(아사노 소이치로(浅野総一郎) 2세)와 결혼 | |
료코(일본어: リヨコ|료코일본어) | 오야마 토모에(大山巴)와 결혼 |
8.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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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후 사건
- 자유민권운동
- 애국공당
- 자유당
- 대일본제국 헌법
- 민선의원설립건백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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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Making of Moder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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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Perceptions of the "Meiji Restoration" in Colonial Taiwan 1
https://www.ritsum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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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amuraichu Senzogaki-keizucho
Kochi prefectural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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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Koutei-zoho Azumakagami
Dainippontos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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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Taisuke Itagaki's gr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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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垣信方の娘婿。実は於曾氏。永禄元年(1558年)、武田信玄の命に依って、板垣家を再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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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永原一照次男
[8]
문서
板垣退助五男、絶家再興
[9]
문서
乾正春の養子となる
[10]
문서
板垣退助次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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乾正厚の養子となる
[12]
문서
乾友正家の絶家再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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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安倍元首相『自由は死せず』刻む高知の寺、板垣退助の位牌に揮毫」
https://www.gifu-np.[...]
岐阜新聞
2022-07-16
[14]
웹사이트
「『自由は死せず』安倍氏記す 板垣退助の位牌に―銃撃事件1カ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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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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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倍元首相、板垣退助の位牌に「自由は死せず」の揮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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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新聞
2022-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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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板垣退助の勤皇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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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益財団法人アパ日本再興財団
2023-08-17
[17]
문서
明治10年10月31日以降の戸籍(本籍地・高知 潮江新田1番地、および東京転籍後の戸籍謄本)による。(『板垣精神』)
[18]
문서
明治5年編成〜明治10年10月31日迄の戸籍(本籍地・高知市中島町44番屋敷、および同中島町69番屋敷)による。板垣退助は明治5年から同10年迄の5年間のみ戸籍謄本に「4月17日生」と記されていた。(髙岡功太郎『板垣家の戸籍謄本に見る生年月日の変遷』(所収『板垣退助の家族』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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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垣退助105回忌に寄せて』
NPO法人板垣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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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家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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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宰相列伝 : 大隈重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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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隈板内閣の成立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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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翁夢物語
中央公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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板垣退助君傳記
原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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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治維新百年・板垣退助先生薨去五十年祭趣意書』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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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
現存日本最古のルイ・ヴィトンは板垣退助が購入
https://twit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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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日本は侵略国にあらず』板垣退助
https://jpsearch.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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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神と人道
[29]
서적
明治功臣録
明治功臣録刊行會編輯局
[30]
문서
大東亜戦争後の世界秩序や、日本の置かれている不公平な立場などが最たるものである。
[31]
문서
君主と人民とは決して相分つべきものにあらず。何となれば君主といひ人民といふも、決して單獨に存在するものにあらずして、人民ありての君主、君主ありての人民なるを以て也。則ち既に君主といふうちには、人民の意志の綜合、換言すれば輿論の結晶體といふ意味が含まれ、人民といふうちには又た之を統治して其秩序を維持する所の、最高權を執る者の存在すといふ意味が含まる。是故に民無くして君在るの理無く、人民無きの君主は一個の空名たるに過ぎず。(中略)專制君主と雖も其理想は實に人民を撫育し、其安寧幸福を求むるに在り。是故に君主と人民とは二にあらずして一也。決して始めより相敵對すべき性質のものにあらず。兩者は始めより其目的を同うし、利害を齊うせるものにして、恰も唇齒輔車の關係に在り。(中略)君主主義の神髓は卽ち取りも直さず民本主義の神髓たる也。(中略)君主々義といひ若くは民本主義と稱して、互に相爭ふが如きは、抑も誤れるの甚だしきものにして、君民は同一の目的を以て相契合融和し、共同して經綸を行ふべきものたることを知るに難からざるべし。而かも特に我邦の體制に於ては、君民の關係は恰かも親子の關係の如く、先天的に既に定まり(中略)我邦に於ては建國の始めより、君民一體にして、君意と民心は契合して相離れず。之が爲めに我邦に在ては毫も禪讓若くは選擧の形式を躡むの必要無く、人民の總意、輿論は直ちに君主によりて象徴せられ民意は卽ち君意、君意は卽ち民意にして君民は一にして決して二致無き也」より。
[32]
웹사이트
『板垣精神 -明治維新百五十年・板垣退助先生薨去百回忌記念-』
https://ci.nii.ac.jp[...]
一般社団法人 板垣退助先生顕彰会
2019-02-11
[33]
서적
大日本帝国の民主主義
小学館
[34]
문서
鈴木安蔵は「板垣(退助)君並に立志社先輩諸氏は武士階級の教育を受け育った人々であり、彼等の述べるところの自由主義とは『泰西大家の新説』と日本文化によって醸熟された武士道精神の融合により誕生したものである」とする。
[35]
문서
「自由党」の前身が「愛国公党」、「愛国社」であり、「自由主義」と「愛国主義」が同等の位置に置かれていた。
[36]
문서
全国水平社より設立が早い
[37]
문서
王羲之筆『蘭亭序』「古人云、死生亦大矣、豈不痛哉。(古人云ふ、死生も亦た大なりと。豈に痛ましからずや) 意味「昔の人は言った。死ぬことも生きることも(人にとっては)実に重大なことである。(それならば)なんと悲痛なことだろうか」また、荘子(内篇):德充符の「仲尼曰、死生亦大矣、而不得與之變」からとも。
[38]
문서
板垣退助、楠木正成ともに「尊皇討幕」であったこと、両者ともに時代の転換期の武将で、多くの人の精神的支柱となり、国会議事堂には板垣退助、皇居には楠木正成の銅像が建てられ、また両者とも軍人出身で紙幣の肖像になった人物として共通項が多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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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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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聞き書き土佐私史・採訪の譜(2)-板垣退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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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10-10
[41]
문서
板垣山・墓所の墓石による。
[42]
서적
伯爵後藤象二郎
[43]
문서
蝦蟇の油の製法は、四六の蝦蟇の四方に鏡を立て、下に金網を敷く。蝦蟇は自分の姿が鏡に映るのを見て驚き、タラリ、タラリと脂汗を流す。これを金網の下の容器に集め、柳の小枝で、21日間煮詰める」とあり。
[44]
문서
帝国公道会創立式典の演説で、板垣自身が「私は耳が聴こえませんが…」と語っている。
[45]
서적
吉良川老媼夜譚
[46]
신문
大多摩新報
[47]
문서
谷干城談
[48]
웹사이트
高知歴史散歩『武田信玄と板垣退助(2)』広谷喜十郎著。-高知市広報「あかるいまち」2007年2月号より-
http://www.city.koch[...]
[49]
문서
谷干城談
[50]
문서
『帝国公道会』式辞(大正8年2月23日)
[51]
문서
(板垣自身の言葉で)「吉田(東洋)の関係は一切ございませぬ」と回想している。(『維新前後経歴談』
[52]
서적
御侍中先祖書系圖牒
旧山内侯爵家
[53]
서적
板垣退助君伝 第1巻
自由新聞社
[54]
서적
佐藤一斎と其の門人
[55]
서적
山鹿素行兵法学の史的研究
[56]
서적
武士道教育総論
壮神社
[57]
서적
土佐維新史料
[58]
서적
板垣退助 -板垣死すとも自由は死せず-
高知市立自由民権記念館
[59]
웹사이트
文久2年6月6日付片岡健吉宛板垣退助書簡(国立国会図書館蔵)
https://dl.ndl.go.jp[...]
[60]
문서
薩摩藩士・大山綱良は日記に「文久2年4月16日、長州永井雅楽ト申仁、専ら奸計ニ而候得共、周旋致候由、岩倉殿弥御正論相立候事、長州公(毛利慶親)早々御下京相成候旨、先達而被仰出候事」(『大山綱良日記』)とあるように、長井雅楽の『航海遠略策』を「奸計」と考える意見が多かった。
[61]
서적
寺村左膳道成日記(1)
1862-10-17
[62]
서적
板垣退助
[63]
서적
維新前夜経歴談
[64]
간행물
板垣会会報
NPO法人『板垣会』
[65]
문서
土佐藩の軍事職の一つ
[66]
서적
武市瑞山関係文書(1)
[67]
서적
御侍中先祖書系圖牒(「乾退助」項)
土佐藩
[68]
서적
日本歴史を散歩する
[69]
문서
土佐の地名
[70]
문서
土佐藩の力士の名
[71]
서적
江戸幕臣人名事典(多聞櫓文庫目録明細短冊の部)
[72]
서적
迅衝隊出陣展
[73]
서적
無形伯旧夢談
[74]
서적
幕末維新(第5編)
山内家史料刊行委員会
[75]
서적
日光東照宮と板垣退助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
[76]
서적
行行筆記
[77]
서적
中岡慎太郎先生
[78]
문서
石川清之助は中岡慎太郎の変名
[79]
문서
西郷隆盛のこと
[80]
문서
薩長同盟が結ばれた場所
[81]
서적
維新前後経歴談
[82]
웹사이트
『板垣精神』
https://ci.nii.ac.jp[...]
一般社団法人 板垣退助先生顕彰会
2019-09-10
[83]
서적
維新前後経歴談
[84]
서적
無形伯旧夢談
[85]
서적
行々筆記
1867-05-25
[86]
서적
行々筆記
1867-05-26
[87]
문서
ベルギーからの直輸入ではなく、米国南北戦争で使用され、戦争終結後に余剰となった武器類が日本へ輸入されたもの
[88]
서적
保古飛呂比
[89]
서적
明治功臣録
明治功臣録刊行會編輯局
1915
[90]
뉴스
龍馬宛て、桂の手紙原本公開 討幕の決意促す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04-12
[91]
문서
左行秀の鍛冶場は近藤長次郎の家の近くにあり、退助以外にも坂本龍馬の兄・坂本直方の佩刀も作成
[92]
서적
土佐維新史料 書翰篇(1)
[93]
서적
明治功臣録
明治功臣録刊行會編輯局
1915
[94]
논문
京都養正社所蔵 坂本龍馬書状について
大阪府立大学
1972
[95]
문서
8月20日(旧暦)(太陽暦9月17日)時点で、藩論の大勢は大政奉還論に固められていた
[96]
서적
板垣退助の伝えたい言葉
板垣退助先生顕彰会
[97]
문서
詔
[98]
서적
維新前後経歴談
[99]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
[100]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
[101]
서적
徳川慶喜公伝
https://dl.ndl.go.jp[...]
竜門社
1918
[102]
서적
陸援隊始末記
[103]
문서
句読点を追加し、読みにくい箇所は、原文より一部を平仮名に改めた
[104]
서적
板垣退助君伝記
原書房
2009
[105]
문서
龍馬自筆本が2枚残っており、国立国会図書館と下関市立長府博物館に所蔵
[106]
문서
従来は慶応3年6月に起草された『船中八策』を基礎に『新政府綱領八義』が書かれたとされていたが、現在は『船中八策』は、『五箇条の御誓文』と『新政府綱領八義』を混ぜて作られた後世の歴史小説のフィクションであることが確定している。
[107]
웹사이트
百科事典 王政復古 (日本)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2021-10-08
[108]
간행물
徳川内府大政返上将軍辞職ノ請ヲ允シ摂関幕府ヲ廃シ仮ニ総裁議定参与ノ三職ヲ置ク(宮堂上ニ諭告)
{{NDLDC|787948/9}}
法令全書
1867-12-09
[109]
서적
徳川慶喜公傳(4)
[110]
서적
板垣退助君戊辰戦略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再編復刻
[111]
문서
(書き下し)「土佐少将(山内豊範)へ、徳川慶喜反逆妄挙を助け候条、其の罪、天地に容ちあらざるにつき、讃州高松、豫州松山、同、川之江を始め、これまでの幕領惣てを征伐し、(領地の)歿収これ有るべく仰出され候。宜しく軍威を厳にし、速やかに「追討之功」之旨を(朝廷へ)奏すべく、御沙汰候事。(慶応4年)正月十一日、但し、両國中の幕領の儀は勿論、幕吏卒の領地迄も、惣て取調べ言上これあるべく、かつ人民の鎮撫は、ひとえに王化に服すべきよう致すべく所置候事」
[112]
문서
香川県善通寺市碑殿町と三豊市三野町大見の間に位置する峠。現在の国道11号線上にある。
[113]
서적
高松に進軍してきた板垣退助
[114]
문서
会津藩出身で東京帝国大学総長などを歴任した山川健次郎は、会津藩を評して「兵法や武器が時代遅れで、藩主の松平容保は幕府への忠誠心は厚かったが、情報に疎く藩主として藩内の多数派だった主戦論を抑えられなかった」ことや、「京都御所警備という朝廷に近い場所で任務に就いていたにも関わらず情報を軽視し、また会津藩における身分制度が他藩より厳しく、武士や地主以外の領民の意思を軽視し、戦争準備や軍制改革も遅かった事が敗因」としている。「恭順派の意見を戊辰戦争を始まっても一層排斥し、勤王派で長州などと交渉可能な人材であった神保修理を早々に切腹に追い込み朝廷からの信用を失墜」したこと、「鳥羽・伏見の戦いでの圧倒的敗北となった後も強硬路線を主張した佐幕派こそ、藩主として説得するか処罰するかなどして、時代の変化を理解させるべきだった」と会津藩の無策ぶりを痛烈に批判している。
[115]
문서
土佐藩兵2個小隊:小笠原謙吉(迅衝隊三番隊)、谷重喜(迅衝隊四番隊)、北村重頼(迅衝隊砲兵隊)(7門)鳥取藩兵6個小隊:佐分利九允銃士隊、天野祐次隊、藤田束隊、宮脇縫殿隊、建部半之丞隊、山国隊(丹波の農民有志による義勇兵)、佐分利鉄次郎砲兵隊(2門)、高島藩半小隊(伍長岩本順吉郎指揮)
[116]
문서
天然理心流の門人・佐藤彦五郎らを中心とした部隊。
[117]
서적
無形板垣退助
[118]
전시회
迅衝隊 出陣展
中岡慎太郎記念館
[119]
문서
億兆安撫國威宣揚の(明治天皇)御宸翰
早稲田大学
[120]
서적
奥州改元大政元年資料(東武皇帝の閣僚名簿)
[121]
서적
板垣退助君戊辰戦略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再編復刻
1882
[122]
서적
無形板垣退助
[123]
웹사이트
会津藩士埋葬の史料発見『戦死屍取仕末金銭入用帳』の写し
http://www.minpo.jp/[...]
福島民報
2017-09-25
[124]
서적
板垣精神
[125]
웹사이트
明治2年(1869年)6月|薩長土肥の4藩主が版籍奉還を願い出る:日本のあゆみ
https://www.archives[...]
国立公文書館デジタルアーカイブ
2018-02-01
[126]
서적
立国の大本
[127]
서적
廢藩置縣ノ詔
{{NDLDC|759506/18}}
中村定吉
1893
[128]
서적
板垣退助君傳記(第4巻)
原書房
[129]
서적
滅却心頭火自涼・甲斐の名刹・恵林寺の至宝
2014
[130]
서적
幟仁親王行実
{{NDLJP|id=1212495/1[...]
高松宮家
1933
[131]
서적
板垣退助君傳記(第2巻)
原書房
[132]
서적
岩倉右大臣を喰違外に刺す
{{NDLDC|1920332/79}}
林泉社
1936-1940
[133]
서적
頭山精神
[134]
웹사이트
知っていましたか? 近代日本のこんな歴史|板垣退助暗殺未遂事件~「板垣死すとも自由は死せず」~
https://www.jacar.go[...]
[135]
서적
日本の有名一族
幻冬舎新書
2007
[136]
문서
芝居では刺された瞬間に叫んだように演出されているが、刺された瞬間や格闘中に発したものではなく、犯人を捕縛直後に板垣が犯人に対して言った言葉であることは『岡本都與吉(岐阜県御嵩警察署御用掛)報告書』等により確定しており異論はない。かつて『報知新聞』の記者であった某氏によると、この「『板垣死すとも自由は死せず』の言葉は、内藤魯一が事件時に叫んだ言葉であり、内藤が板垣が叫んだ事にした」という事を聞き真相を探るべく取材を重ねたが、それを裏付ける証拠が無く都市伝説の類であることが判明している。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は、板垣退助百回忌にあたり報道機関各社に対して今なおYouTubeなどで閲覧数を稼ぐ目的で根拠なき誹謗中傷をしているチャンネルを見かけるが、報道機関もそれらの影響を受け「叫んだらしい」や「叫んだとされる」などと語尾を濁して報道することは「歴史の真実性を遠ざけ、陰謀論のような根拠なき都市伝説に同調することになり、また故人を冒瀆することにあたるため絶対にやめて欲しい」と声明を発表している。
[137]
서적
明治憲政経済史論
東京帝国大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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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大阪朝日新聞
188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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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有喜世新聞
188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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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自由黨史
五車楼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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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板垣退助暗殺未遂事件 ~「板垣死すとも自由は死せず」~
https://www.jacar.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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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板垣君岐阜遭難記録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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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板垣退助
中公新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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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イタイガーヤキー』と言った」という誤解
[145]
서적
ハーバート・スペンサー コレクション
[146]
문서
高知市立自由民権記念館寄託
[147]
웹사이트
ルイ・ヴィトン、板垣退助もご愛用 ひ孫、トランク寄託
https://web.archive.[...]
201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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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顧客名簿によると、日本人最古のルイ・ヴィトン購入者
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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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自由党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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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明治英名百詠撰
18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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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板垣退助君傳記(第2巻)
原書房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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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自由新聞
1884-05-14
[153]
서적
板垣退助君傳記(第2巻)
原書房
2009
[154]
서적
自由黨史
[155]
서적
自叙伝
[156]
서적
明治文化全集(22)
[157]
문서
華族となった板垣は衆議院議員の被選挙権を喪失
[158]
서적
(自由民権)舊各社事蹟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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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板垣退助君伝記
原書房
2009
[160]
서적
元勲板垣退助伯爵傳
[161]
서적
元勲板垣退助伯爵傳
[162]
서적
獄裡の夢 : 一名、相原尚褧君実伝
金港堂
1889-07
[163]
서적
詔勅類纂祝辞演説一千題
東京博文館
1892-04-25
[164]
문서
板垣退助の婿の伯父と、武市瑞山の叔母の娘が婚姻
[165]
서적
千賀覚書
[166]
서적
板垣退助君傳記
[167]
뉴스
時事新報
1892-02-14
[168]
문서
明治7年(1874年)に開通し、のちの東海道本線となる官営の鉄道。
1874
[169]
서적
板垣退助君傳記(第3巻)
原書房
[170]
뉴스
朝野新聞
1892-02-13
[171]
서적
明治25年高知県臨時総撰挙暴動彙報
[172]
뉴스
東京朝日新聞
1892-02-17
[173]
논문
憲政党の党内構造について
https://cir.nii.ac.j[...]
大正大学
2013
[174]
문서
当時は「坂」が俗字、「阪」が正字と考えられており、あえて「阪本龍馬」と書かれたもので誤字では無い。
[175]
웹사이트
坂本龍馬記念碑文写
https://emuseum.nich[...]
[176]
서적
林献堂著作集
[177]
서적
日本は侵略國家にあらず、社会主義の脅威
板垣退助先生顕彰会
[178]
간행물
官報
1920-06-03
[179]
문서
板垣家の家督相続
[180]
웹사이트
Locipo 7月16日は板垣退助の命日「板垣死すとも自由は死せず」の地で式典 。銃撃で死亡した安倍元総理の死を追悼。板垣退助の玄孫・髙岡功太郎さんらが参列
https://locipo.jp/ar[...]
東海テレビ
2022-07-17
[181]
뉴스
安倍元総理銃撃から1週間余り、岐阜で市民らが元総理の死を悼む式典
東海テレビ
2022-07-17
[182]
웹사이트
安倍元首相、板垣退助の位牌に「自由は死せず」と揮毫
https://www.chunichi[...]
中日新聞
2022-07-16
[183]
웹사이트
安倍元首相「自由は死せず」刻む高知の寺、板垣退助の位牌に揮毫
https://www.gifu-np.[...]
岐阜新聞
2022-07-16
[184]
웹사이트
「岐阜事件」から140年・岐阜銅像前で行われた板垣退助を偲ぶ会で板垣退助の玄孫・髙岡功太郎さんらが出席し安倍元総理を追悼
https://newsdig.tbs.[...]
中部日本放送(CBCテレビ)
2022-07-17
[185]
서적
近代哲学における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の影響
https://www.christia[...]
宮庄哲夫
[186]
서적
板垣伯対舎身居士・政教問答
田中弘之(舎身居士)
1903
[187]
서적
神と人道
[188]
서적
社会主義の脅威
[189]
서적
板垣が大江卓と話せる言葉
[190]
전시회카탈로그
板垣退助愛蔵品展
高知市立自由民権記念館
2011-10-26/2011-12-18
[191]
간행물
官報
1887-05-10
[192]
간행물
官報
1893-06-17
[193]
간행물
官報
1909-07-12
[194]
간행물
官報
1919-07-17
[195]
간행물
官報
1896-09-30
[196]
문서
韓国併合記念章受章
1912-08-01
[197]
간행물
官報
1916-12-13
[198]
문서
永原一照次男
[199]
서적
遠碧軒記
[200]
문서
乾正厚の養子
[201]
문서
兄守正の養子
[202]
문서
直磨
[203]
문서
秋山有世夫人
[204]
문서
乾正厚の養子
[205]
문서
乾源五郎友正家
[206]
문서
福岡孝弟後妻
[207]
서적
杉山茂丸伝
島津書房
1992
[208]
서적
板垣精神
[209]
서적
板垣退助君戊辰戦略
[210]
문서
国技館命名
[211]
간행물
名士の嗜好
https://dl.ndl.go.jp[...]
中央新聞社
1933-03-00
[212]
서적
土俵の修羅
時事通信社
[213]
서적
明治憲政経済史論
国家学会
1919-04-15
[214]
서적
板垣退助君傳記(第2巻)
原書房
[215]
서적
板垣精神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
[216]
서적
板垣精神
2019-00-00
[217]
서적
板垣退助先生銅像供出録
財團法人板垣會
[218]
서적
頭山精神
1943-04-06
[219]
문서
[220]
서적
世の中
[221]
서적
板垣君兇変・岐阜の夜嵐
1882-00-00
[222]
서적
舊各社事蹟
[223]
서적
寺村左膳道成日記(1)
[224]
서적
吉田東洋遺稿
1861-03-29
[225]
서적
伯爵後藤象二郎
1860-10-10
[226]
인터뷰
昭和天皇会見
1977-08-23
[227]
서적
昭和天皇発言録―大正9年~昭和64年の真実
小学館
1989-00-00
[228]
서적
人物畫傳
有楽社
1907-07-20
[229]
서적
明治憲政経済史論
国家学会
1919-04-15
[230]
서적
板垣先生記念事業復興計画趣意書
財団法人板垣会
1958-00-00
[231]
웹사이트
THE HALL OF VALOR
https://valor.milita[...]
[232]
서적
南海大震災誌
[233]
문서
高知城公園・板垣退助先生銅像供出の壮行の辞
1943-09-02
[234]
서적
勤王 即憲政の板垣退助
[235]
서적
日光東照宮と板垣退助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
[236]
서적
伊藤痴遊全集 第7巻
[237]
서적
維新史の片鱗
1921-00-00
[238]
서적
近代日本偽りの歴史
扶桑社新書
2017-00-00
[239]
서적
敬天愛人西郷隆盛
学研M文庫
[240]
서적
蘇翁感銘録
1944-00-00
[241]
서적
清廉潔白にして信念の人
1984-00-00
[242]
서적
日本人の百年(4)-自由民権運動-
世界文化社
[243]
서적
東京府立一中(旧制中学校五年制・現 都立日比谷高校)昭和十四年入学同期会・傘壽記念号
[244]
웹사이트
自由のともしび
https://www.i-minken[...]
2011-10-01
[245]
서적
随筆春城六種
[246]
서적
明治政府を担った人々(3)板垣退助
新人物往来社
1971
[247]
방송
英雄たちの選択・板垣退助“自由民権”の光と影
NHKBSプレミアム
2020-10-07
[248]
서적
生きている歴史
[249]
문서
原田助の日記に記された新島襄の講話
[250]
서적
新島襄の福島伝道 : 会津若松教会の設立を巡って
同志社大学同志社社史資料センター
2017-02-28
[251]
서적
咢堂漫談
[252]
서적
坂本中岡暗殺事件
1906
[253]
서적
生きている歴史
[254]
인터뷰
郷土史家・乾常美との対談
[255]
서적
無雙直傳英信流居合に就いて
土佐史談
1933
[256]
서적
英信流居合術と板垣伯
土佐史談
[257]
문서
板垣退助伯爵彰徳会設立趣意書
[258]
서적
近代日本漫画百選
岩波書店(岩波文庫)
1997
[259]
서적
神と人道
[260]
문서
약 80m
[261]
웹사이트
板垣退助の壮年期の古写真 初公開。後藤象二郎、乾正厚と共に撮影
https://www.chibanip[...]
[262]
뉴스
板垣退助の壮年期の古写真 初公開。後藤象二郎、乾正厚と共に撮影
千葉日報
2012-07-13
[263]
웹사이트
スポニチ
https://www.sponichi[...]
2009-07-25
[264]
문서
駐日公使発、本国(ドイツ)向け外交書簡
[265]
문서
「大正二年十月三日於牛久葡萄園神谷氏の為、伯爵板垣退助」
牛久シャトー
[266]
방송
築100年の家を訪ねる旅・明治の要人が集った歴史的広間・茨城県「牛久シャトー」続編
BS朝日
2022-08-17
[267]
웹사이트
朝萬(あさよろず)旅館の宿泊者
https://satte-asayor[...]
[268]
문서
陸軍士官学校創設地「市ヶ谷記念館」
1874
[269]
문서
祇園寺慰霊法要
1908-09-12
[270]
방송
所さんのそこんトコロ
テレビ東京
2021-08-13
[271]
문서
京都土佐藩邸
1871
[272]
문서
薩土討幕の密約
2019-09-22
[273]
웹사이트
横山家住宅主屋(横山医院)
https://web.archive.[...]
文化庁(大阪府文化財ナビ)
[274]
문서
浪花座(戎座)
[275]
서적
植民地在住者の政治参加をめぐる相剋「台湾同化会」事件を中心として
https://researchmap.[...]
[276]
문서
板垣信方的娘婿
1558
[277]
문서
永原一照次男
[278]
문서
板垣退助五男、絶家再興
[279]
문서
乾正春為養子
[280]
문서
板垣退助次男
[281]
문서
乾正厚爲養子
[282]
문서
乾友正家絶家再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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